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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르네상스와 피렌체 가문

출처 : http://mahan.wonkwang.ac.kr/nonmun/2006non/16.htm


르네상스 문화 예술에 대한 메디치가문의 역할

 

    I. 머리말

  

   II. 로렌조 데 메디치의 등장

 

   III. 예술의 도시 피렌체 

 

   IV. 메디치가와 르네상스 예술 

 

   V. 예술후원의 가치와 현실적 이익

 

   VI. 맺음말

 

   [참고문헌]

 

 

 

 

I. 머리말

 

 중학교 2학년에 들어가면서 사학과정에서 처음 르네상스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던 필자에게 교과서에는 정확히 부활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 설명이 나와 있었다. 과연 어떤 종류의 부활이란 말인가 하는 궁금을 가진 필자는 암흑시대라고도 불리던 중세의 종교와 신분적 억압에서 벗어나 보고 싶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의 분출. 바로 그것이 나중에 후세인들이 르네상스라고 부르게 된 정신운동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교과서나 대중매체를 통한다거나 혹은 직접 방문한다던가 하는 방법으로 현대인들은 과거 그 시대의 찬란한 문명과 접할 수 있다. 르네상스라는 시대의 도약의 문을 연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 중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남겨진 곳은 천재들의 도시이자 꽃의 도시라 불리던 피렌체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피렌체가 중심지로서 나설 수 있었을까? 그 까닭을 정확하게 논하고자 한다면 우선 근대의 목전 15세기에 들어서자 피렌체에는 천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선 자들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화가들과 단테, 마키아벨리와 같은 문학가들이다. 이들은 모두 다 피렌체가 자랑스러워할만한 르네상스의 거인들이다. 그리고 이런 위대한 정신들의 뒤에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피렌체의 주군이었던 메디치 가문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혈통과 소유하고있는 토지가 인간의 가치를 가르쳐주던 것이 중세시대였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은 고귀하다고 자랑할만한 피가 흐르는 왕족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엄청난 영지를 지니고 있는 대영주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한 그들이 현대로 비교하자면 케네디나 록펠러도 비교하지 못할만큼의 권력을 유지하고 르네상스를 탄생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며 또 그렇게 하고자 했던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3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왕관만 없는 왕가였으며 피렌체의 지배자였던 메디치가문이 단순하게 문화예술을 탄생시키는데 순수한 기쁨만을 느끼고 아무런 사심이 없는 후원을 행했다면 그것은 위선이라도 말 할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피렌체는 상인이 아니면 존경을 받을 수 없다고 알려진 최초의 현대도시라 할 수 있었다. 이들의 정점에 서 있는 메디치 가문은 당연 실리를 가장 우선으로 여기는 상인가문이었다. 단순하고 고상한 취미만을 위해 엄청난 자금과 시간을 투자했다는 것은 당연 상인의 지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메디치가는 자신들의 권력과 영광을 위한 메디치 드라마 탄생을 위해 르네상스의 문화예술의 강력한 후원자로 탄생했다는 것이 가장 합당한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메디치 가문의 황금기와 예술의 도시인 피렌체에서의 메디치가문의 역할 그리고 메디치 가문의 문화예술 후원의 목적에 대해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II. 로렌조 데 메디치의 등장

 

1. 신의 축복을 받은 로렌조 데 메디치

 

 국부란 명예로운 호칭을 가지고 가문을 부흥시킨 코시모 데 메디치 사후 가문을 물려받은 피에로 데 메디치는 병약했기에 가문과 피렌체 공화국을 5년밖에 이끌지 못하고 그의 아들이던 로렌조 데 메디치가 2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그 뒤를 잇게 되었다. ‘일 마니피코’(위대한 사람 또는 화려한 사람)라는 칭호가 보여주듯 로렌조는 조부나 부친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매사에 화려하고 당당했다. 로렌조 데 메디치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한 구절이 남아있다.

 

“그는 운명으로부터 그리고 신으로부터 최대한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1

 

실로 로렌조 데 메디치만큼 일생이 행운으로 채색된 인물도 드물다. 무엇보다도 물려받은 것부터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가진것들은 논해보자면 이러하다.

첫째로 증조부와 조부 그리고 부친 이렇게 3대에 걸쳐서 구축되고 증강된 메디치 가문의 강대한 경제력이 그에게는 남겨져 있었다.

둘째로 그에게는 조부와 부친 2대에 걸쳐서 구축되고 증강된 메디치에 대한 피렌체 시민의 신뢰와 사랑이 있었다.

세 번째로는 조부와 부친 2대에 걸쳐 구축되고 증강된 메디치에 대한 다른 나라 지도자들의 경의에 입각한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네 번째로 로렌조는 조부와 부친의 특히 조부 코시모의 주도면밀한 배려로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조부가 주최한 심포지엄에 나오는 학자나 지식인들과 토론하기만 하면 되었으니 간단하고 자연스러운 교육과 교양의 환경이라 말 할 수 있다. 그 덕택에 로렌조는 완벽하게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것이 가능했고 풍부한 지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훗날 로렌조 그 자신도 그의 자식들에게 같은 교육환경을 제공했지만 장자였던 피에로 데 메디치와 막내아들의 경우 이렇다 할만한 효과를 얻지 못한 걸로 보아서는 교육이란 받는 쪽의 소질을 바꿀만한 힘은 없고 소질을 신장시키는데 유효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주어진 다섯 번째의 행운은 어릴 때부터 완벽한 제왕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조부도 부친도 공식적으로는 한 시민으로서 살고 한 시민으로서 죽었지만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메디치의 명성과 경제력이 국빈이라도 내방할 될 경우 중심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타국의 왕족들이나 지도자들이 피렌체를 방문할 때 머무는 곳은 언제나 메디치의 저택이었고 그들을 주빈으로 하는 연회도 메디치 궁에서 열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술적이나 정치적인 면에서 피렌체와 라이벌관계라고도 말 할 수 있는 베네치아공화국을 돌아보자면 이러하다. 베네치아공화국에서는 이와 같이 한 시민이 돌출되는 사태를 사전에 막기 위해 국빈급 손님을 맞이하는 연회는 원수 관저에서 개최하고 숙소도 유력자들의 저택을 차례로 할당하는 방식을 고수했으나 베네치아는 과두정치체제였다.2 같은 공화국을 칭하더라도 피렌체는 참주정치체제였으니 방문자 역시 가장 큰 권력자와의 접점을 원하고 있을 테니 결국은 메디치가에 권력이 집중되고 마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로렌조는 어릴 때부터 지체 높은 사람들과의 교류에 익숙해졌다. 밀라노 공작의 후계자가 내방했을 때는 나이 열 살에 피렌체 밖에까지 나가서 맞이하는 임무를 맡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조부의 사망 이후로 가문을 승계받은 부친이 병상에 누워 있는 일이 많았으므로 아버지의 대리로 로마의 교황을 방문하는 일 역시 맡게 되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대신하여 피렌체공화국의 국회인 100인위원회에도 자주 출석하는 기회를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3 이는 자신의 병을 잘 아는 부친이 이와 같이 하여 제한연령에 이르지 않은 아들이 피렌체 안팎의 공식 석상에 얼굴을 내미는 부자연스러움을 부자연스럽지 않게 하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여겨진다. 또 그는 스물이라는 젊은 나이에 독립하는 행운을 가지고 있었다. 신은 상당히 뒤늦게 르네상스라는 무대에 등장한 그의 조부 코시모에게는 충분히 그의 역량을 발휘하라는 뜻으로 일흔 다섯의 장수를 주었지만 로렌조에게는 마흔 셋이라는 단명이라는 불운과 이러한 행운을 동시에 안겼다.

 

2. 예술가 로렌조 데 메디치

 

 행운으로만 이루어진 듯한 인생의 로렌조이지만 1478년 로렌조와 동생 줄리아노를 살해하려던 파치가문의 습격 사건에서 알 수 있지만 피렌체의 주도권을 쟁탈하려는 가문들 사이의 경쟁을 매우 치열했으며 로렌조는 결국 이 경쟁에서 승리하여 피렌체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승리와 함께 1492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메디치의 전성기가 도래하게 되는데 유년시절 로렌조는 아버지가 후원한 인문학자 피치아노를 가정교사로 하여 인문학을 배웠고 그 자신 역시나 이탈리아 문학사에 남는 훌륭한 시인이었으며 항상 유능한 학자들을 자기 주변에 두고 그들과 견줄 정도의 지성 또한 갖추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시를 바이올린 음의 배경으로 낭송하는 것을 즐겼으며 축제의 무도회 곡을 작사하기도 했다. 로렌조의 시는 놀랄 만큼 열정적이고 다양했다 평가되는데 현재까지 계속 출판되고 있으며 기쁨과 사랑과 영혼의 내용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 중 그의 대표적 작품인 바쿠스의 노래라는 이 작품은 대중적일뿐 아니라 르네상스 전성기의 피렌체를 충실하게 반영한듯한 느낌이다. 바쿠스의 노래의 앞 구절은 이러하다.

 

“젊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젊음이 곧 끝나고 사라질 것이니 행복하고 싶으면 그 순간을 붙잡아라. 내일은 안 올 수도 있으니”4

 

그밖에 그의 시구는 종교적인 정서나 육체의 욕망에 따라 때로는 슬프기도 하고 때로는 기운이나 희망이 넘치기도 했으며 종종 환멸에 가득 차기도 했다. 그는 종교에 헌신적인 시를 쓰기도 했지만 때로는 신성 모독적인 풍자시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시에는 토스카나의 아름다운 경치와 희로애락에 대한 감정이 생생하고 강렬하게 표현되었던 걸로 보아 자국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자국 애착을 증명하는 요소는 한 가지가 더 있다. 학문을 중시하던 로렌조는 그리스 철학자와 라틴 시인들에 대한 학자들의 열정에는 공감했지만 이탈리아어를 경멸하고 근대의 토스카나 시인들의 업적을 무시하는 인문주의자들에게는 관대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시를 쓸 때 라틴어보다는 단테나 보카치오를 본보기로 삼고자 했으며 어렸을 때 말하기 위해 배우고 쓰던 자국의 언어를 선호했다. 토스카나 지방에 헌신적이었던 그는 시인들이 이탈리아어의 완벽한 사용법을 위해 노력하고 단테가 상류층이 아닌 하류층의 위치한 자들의 시인에 불과하다는 니콜로 니콜리의 말을  듣고 격분한 적도 있다는 걸로 보아 로렌조 데 메디치가 얼마나 자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 알 수 있다.

 

3. 후원자로서의 로렌조 데 메디치

 

1) 학문적 후원

 

 현대까지 출판되는 작품들을 남길만큼 뛰어난 문인이었던 로렌조 데 메디치는 당연 학문적 지성을 중시하고 그리스어 또한 유년시절의 교육으로 인해 능통했다. 그렇기에 그는 피치아노로 하여금 고전을 번역 출간케 했으며 비잔틴의 필사본을 구하기 위해 동방으로 학자를 보내면서까지 장서를 모아 오늘의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산 마르코 광장의 정원에 고대미술품을 수집하고 학교를 세워 베르톨도라는 선생을 고용해 학생을 가르치게 하였고 작가와 학자들에게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앞에서 밝혔던 것처럼 그는 고대의 서적에 열성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지시로 인해 지오반니 리스카리스는 동방에 두 번이나 파견되었고 피렌체로 귀환하면서 200권이 넘는 그리스 작품을 가져왔는데 그 중 거의 절반은 그 존재 여부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활자 인쇄 기술 역시 그는 중시했다. 이 기술은 15세기 중엽에 마인츠에서 발명되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학자들이 천박하고 야만인들이나사용하는 기술이라 치부했기 때문에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인쇄기는 1465년에는 나폴리, 1467년에는 로마에, 1469년에는 베네치아와 밀라노, 1470년에는 베로나와 파리, 뉘른베르크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1477년에 되어서야 베르나르도 첸니니가 피렌체에 자신의 인쇄기를 설치했다. 5결국 이를 통해 로렌조는 시의 전통상 필경사와 삽화가, 서기들을 고용하여 원고의 사본을 만들어 토스카나 국경 안팎의 여러 도서관이나 공공시설, 그중에서도 특히 피사 도서관에 복사본을 제공했다. 그는 피사와 피렌체 사이에 일어난 오랜 불화를 정리하고 싶었기에 한때는 명성이 자자했으나 그 당시에는 쇠락했던 피사대학을 부흥시키기 위해 1472년 피사대학을 토스카나의 주요대학으로 정립했으며 개인적으로는 매년 대학이 국가에서 받는 보조금의 두 배가 넘는 돈을 기부했다. 그는 피렌체 대학에도 많은 기부를 했는데 이 대학은 당시 전 유럽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유일한 대학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로 보아 그가 얼마나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다.

 

2) 예술적 후원

 

 학문만이 아닌 예술의 후원에 있어서 로렌조는 다른 지방의 왕이나 공작들에게 피렌체 화가를 소개하여 보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렌조에게 조언과 추천을 청했고 그는 기꺼이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1482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밀라노의 지배자인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소개했고 1488년 안토니오 다 산갈로를 나폴리에, 프라 필리피노 리피와 폴라이올로와 같은 이들을 로마에 보낸 것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추천이 피렌체를 예술의 도시로 만들어냈지만 로렌조에게 이러한 추천은 예술 활동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외교정책이었다.6 이러한 그의 중재자적인 역할은 피렌체 안에서도 크게 작용하는데 당시 미술가의 움직임은 상당 부분 로렌조의 손아귀에 있었다고 짐작된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1478년 포르테구에리 추기경의 무덤제작을 위한 선정위원들이 로렌조에게 보낸 편지는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전달해준다. 처음에 선정위원들은 다섯 개의 모델 중 베로키오의 작품을 결정하였으나 폴라이올로의 것을 받아보자 그것이 더 맘에 들어 채택하고자 했다고 했다. 그들은 로렌조가 베로키오를 선호하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 양해를 얻고자 했으나 로렌조가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 이를 사과하게 되었고 현재 추기경의 무덤은 베로키오의 미완성작인 채로 남게 되었다.7 선정위원도 고인의 가족도 아니었던 로렌조가 추기경의 무덤제작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객관적으로 살핀다면 로렌조의 취향이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문제인데도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으로 보아 실로 엄청난 예술적 독재가 아닐 수 없다고 본다.

 

4. 수집가로서의 로렌조 데 메디치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이 그림은 로렌조가 아닌 그의 동명의 사촌 로렌조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가 의뢰한 것으로 추정되어지고 있다.

 

 이렇게 당대 예술의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며 예술의 대부라 불려지는 로렌조 데 메디치였다지만 그의 수집품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상당한 모순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모순이라는 표현보다는 그가 선호하는 취향은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이 아니었다는 것이 분명할지도 모른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부르넬레스키와 도나텔로, 풀라 안젤리코에게 주문하여 산 로렌조 성당과 산 마르코 사원 등을 지원하면서 15세기 전반을 특정 짓는 미술을 낳게 하였지만 로렌조가 실권을 쥐고 있던 15세기 후반의 경우 보티첼리나 프라 필리피노리피의 대표작품 중에는 로렌조의 주문이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었다. 현재 우피치에 소장되어진 보티첼리의 명화 비너스의 탄생도 그가 아닌 그의 사촌이 의뢰한 그림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는 당대의 예술가들을 기용해 그 시대의 것을 소유하는 것보다는 옛 골동품수집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고 돈을 후하게 쓴 것을 사후 메디치 궁에 소장되어 있던 그의 예술품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소장품들 중 당대의 화가들의 작품의 가격보다는 금은 공예품의 가격이 훨씬 상회하였다. 그 중 로마 시대의 카메오(파르네제 컵) 한 점은 10,000fl 이나 될 정도였다. 감히 비교를 해보자면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 중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이 100fl 이고 지오토의 소작품은 6fl, 도나텔로의 작품 역시 30fl정도이다. 무엇보다도 경악스러운 것은 기를란다이오의 거대한 예배당 벽화를 1,100fl 으로 계약했다는 것이다. 손바닥만한 카메오 하나가 4년에 넘게 제작되어진 예배당의 벽화보다 9배나 더 비싸게 지불되어진 걸로 보아 로렌조가 예술적 가치를 높게 친 것은 골동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최고의 화가였다 평가되는 보티첼리의 그림은 한 점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의 수집가로서의 취향은 분명하게 보인다.

그가 예술의 가치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 자신 역시도 예술가였다는 것은 확연히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가치가 천문학적이라 여겨지는 화가들의 작품의 가격이 어떤 것들은 그 시대 돼지 한 마리 가격이었다는8 실로 놀라운 사실을 보건데 예술품이라는 것의 가치는 과연 세월이라는 결정적 요소가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로렌조가 그 당시 고대의 예술품을 엄청난 가격으로 사 모으는 것과 현대의 갑부들이 현대미술화가의 작품보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훨씬 가치 있게 보는 것과 과연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5. 정치가로서의 로렌조 데 메디치

 

 그가 지니고 선호하던 취향이 당대의 예술이 아니었다 할지언정 그가 빼어난 후원자이면서 반면에 능란한 정치가였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는 피렌체의 지도자였지만 공식적 지위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늘에서 조정하는 실권자였으나 겉으로는 공식적인 기관을 통한 것처럼 보여야했고 또 자유가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했기 때문에 비밀리에 이루어야 하는 것이 많았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그는 인문학자이자 후원자이자 시인과도 같은 긍정적 면모뿐 아닌 그늘에서 조정하는 면과도 같은 부정적 면모 또한 지니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많은 역사가들은 그를 조부나 부친보다 파악하기 어려운 인물이라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들과는 다른 핸디캡이 존재하고 있었다. 로렌조 데 메디치는 자신의 조부와 아버지처럼 시뇨리아가 된 적이 없었고 공식적으로는 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앞서 밝혔듯 그는 약관의 나이에 집안이 장이 되었고 시뇨리아는 45세 이상이어야 했으니 43세의 나이에 사망하기까지 22년 동안 실권을 쥐고 있었던 그의 권한은 비공식적이어야 한다는 제약이 따랐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시뇨리아의 자리를 손에 넣지는 못했지만 정계와 재계의 많은 거물들과 다양한 인맥을 형성시키면서 비공식적 시뇨리아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6. 사업가로서의 로렌조 데 메디치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로렌조가 아들에게 이러한 글을 보낸 적이 있다.

 

< 그 시기의 회계장부에서 보다시피 1434년부터 1471년까지 우리는 많은 돈을 썼다. 666,775fl. 이라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돈이 건축과 자선, 세금 등으로 지출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중 일부만이라도 자기 주머니에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내 생각에는 그 돈이 국가를 이리 빛나게 하였으니 잘 쓴 것 같다, 나는 만족

한다.> 9

 

그가 쓴 편지내용대로 로렌조는 피렌체에서는 뛰어난 정치가이자 후원자이며 수집가이고 시인이었기에 피렌체를 예술의 메카로 만들었다. 하지만 메디치 은행은 쇠퇴 일로였다. 누구에게나 단점이 존재하듯 로렌조는 능력있는 정치가이자 예술의 후원자였지만 사업가는 아니었다. 그는 지점 경영자에게 너무 큰 권한을 주었고 총지배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했기에 그의 정책이 잘못되었다 해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경영 부실과 장미 전쟁 중 에드워드 4세에 대한 지나친 대부로 런던 지점은 문을 닫았다. 부뤼주 지점도 마찬가지 운명이었다. 또 미라노에서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증여했던 대지가 일 모로에게 매매되었다. 리옹, 로마, 나폴리 지점 모두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경영 무능과 피렌체 은행업의 총체적인 쇠퇴에 그 이유가 있었다. 피렌체 은행업은 12년 후에 말 그대로 몰락의 길로 나아가고 만다.10 결국 로렌조는 재정적인 파탄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7. 메디치의 위기의 시작과 로렌조의 죽음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재정문제와 가문의 지병으로 인해 로렌조가 자리에 눕게 되자 피렌체에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라는 종교인이 메디치의 정책을 비난하면서 세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피렌체 인들이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호사 행위나 육체의 쾌락, 도박, 축제 등을 모두 버려야 한다 주장했고 초기 기독교회의 순수성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구원을 얻는 일이라 믿었다. 사보나롤라는 만약 훌륭한 법을 만들고 싶다면 우선 하느님의 법에 복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훌륭한 법은 모두 영원한 법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라고 대성당의 연단에서 주장하면서 신의 권력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권력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인들이 고대에 누리던 자유를 버리고 한 폭군이 만들어낸 쇼에 빠져들었다 라며 메디치 정권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1492년 초 로렌조는 겨우 마흔 셋이었지만 이미 죽음에 다다르고 있었다. 몇 년이나 통풍으로 고통 받았기 때문에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1492년 2월 더 이상 사업을 하고 집안을 이끌 만큼 걷지도 못하고 펜을 들 수도 없었다. 결국 그는 4월 8일 카레지의 별장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의 시신은 산 마르코의 수도원으로 운구되었다가 다시 산 로렌조에 옮겨져 옛 성구실의 동생 줄리아노 옆에 안치되었다. 로렌조의 죽음에 인노켄티우스 교황은 ‘이탈리아의 평화는 이제 끝났구나!’ 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가 사보나롤라가 주장한 것처럼 독재자라는 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허나 역사를 돌이켜보면 알 수 있듯이 민중이란 신정을 베풀어주면 특별히 자유 같은 것을 바라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그를 비난한다는 것을 잘못된 오판일 것이다. 로렌조 데 메디치라는 인물의 영향력과 공적은 이 구절에서 명백하게 나오고 있다.

 

<피렌체인은 로렌조 데 메디치가 죽은 1492년까지는 최대의 행복 속에서 지냈다. 로렌조는 이탈리아에 전쟁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면 자신의 사려와 권위로 전쟁의 싹을 미리 잘라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조국 피렌체를 위대하게 만드는 데 모든 관심을 쏟았다.> 11

 

 

III. 예술의 도시 피렌체

 

 메디치라는 지배자가 나타나고 그 중에서도 예술의 대부라고 여겨지게 되는 로렌조 데 메디치라는 인물의 선도아래에 피렌체는 예술의 도시이자 르네상스의 중심지로서 확고한 위치를 다지게 되었다. 현재 피렌체의 시내는 걸어서 한 두 시간 정도의 둘레밖에 되지 않는데 그 안에는 거대하고 화려한 교회들이 열 두 채씩이나 들어가 있고 교회와 저택들을 순례하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이들의 목적은 르네상스 예술의 순례이다. 조토와 마사초, 라파엘로의 그림과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찾아다니며 그 뛰어난 르네상스 예술의 걸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이다. 현재 피렌체라는 작은 도시 안에 자리 잡은 작품들의 목록을 보면 당대의 피렌체가 얼마나 번성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1. 피렌체의 경제

 

 피렌체가 처음부터 이렇게 번성한 도시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피렌체는 13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밀라노, 로마에 비견될 수 없는 작은 도시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피렌체에 그러한 영광스러운 칭호가 붙은 것인지에 대하여 알아보자.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번영이었다. 십자군 원정 이후 교통과 무역이 원활해지면서 피렌체의 상인들은 영국과 벨기에의 양모를 수입하여 모직공업을 발전시켰으며 이들이 생산한 옷감은 유럽전역으로 다시 수출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거래를 가능케 하는 피렌체의 은행지점이 전 유럽에 그물처럼 짜여지게 되었다. 그 결과 피렌체의 통화인 플로린은 요즘 세계의 달러나 유로처럼 당시 전 유럽에서 통용되는 공용화폐가 되고 어음과 송금 등이 자유로운 매우 발달된 은행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은행업은 15세기 대 은행가들을 배출했던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데 메디치 시기에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 당시의 피렌체 경제를 떠받치는 양대 지주는 금융업과 직물업이라고 답변할 수밖에 없지만 학문이나 예술과 마찬가지로 명쾌하게 분류할 수 없는 것이 피렌체 경제의 특징이다. 메디치가문의 등장하니 전 14세기 피렌체의 양대 문벌인 바르디가와 페루치 가문은 금융업, 수공업, 무역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 손을 댔기 때문에 재벌이라 불릴 정도로 유럽 전역에 고객이 퍼지고 영국과 프랑스 및 나폴리 왕가와 교황청은 이들의 최대의 고객이 되었다. 그에 멈추지 않고 네덜란드부터 이베리아 반도의 콘스탄티노플에 이르기까지 상업식민지가 건설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피렌체의 경제체제를 자세히 살펴보자면 그들의 기반을 잡고 있던 것은 길드이다. 한 시인이 피렌체를 상인들의 왕국이라 묘사했다 하는데 그 묘사에 걸맞듯 피렌체는 상업과 제조업을 매우 중시하여 정육업자부터 법률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길드가 다양한 사업을 펼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사업문제뿐만 아니라 도시의 근 종교행사라던가 자선활동, 정치에도 참여해야만 했다.12 당연 이들과 권력자와의 관계 역시 중시되었는데 하나의 예로 세공가의 아들이 모직공업길드의 선거에서 로렌조 데 메디치가 원하는 인물과는 다른 이에게 투표한 것을 사죄하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길드가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피렌체 경제의 지반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2. 피렌체의 정치

 

 결국 피렌체는 14세기에는 경제대국이 이룩되고 그에 걸맞게 15세기에는 정치적으로 성숙기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은 바로 이 시기에 탄생하게 되는데 경제가 아무리 번성한들 정치적 배려에 따른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번영은 오래가지 못한다. 초기의 피렌체는 정치적 혼란기에 빠져있었는데 베네치아를 제외한 당시의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정부 형태는 귀족가문에 의한 전제정치 체제였다. 그러나 토스카나 지방만은 귀족들을 통치에서 제외하는 독특한 공화정이 초기에 설립되어 있었고 그에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하지만 의장이던 콜루초 살루타티(1331~1406)의 사망 후 이러한 공화정의 이상이 퇴색되고 베네치아로 망명 중이던 코시모 데 메디치가 귀환하면서 공화정의 그의 손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배후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고 15세기에 들어서면서 공화정의 의장이란 무의미한 것으로 변질되게 되었으며 코시모와 피에로를 넘어 로렌조의 등장으로 의해 피렌체는 메디치 왕정체제를 이룩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메디치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네트워크가 토스카나와 나폴리를 비롯한 유럽전체에 퍼지면서 피렌체의 정치는 성숙되어져가며 예술의 황금기가 시작된다.13

 

3. 피렌체예술의 탄생

 

 르네상스 예술은 정치적 혼란 속에서 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경우 그는 이탈리아 안의 열강들이 서로 싸우는 시대에 세력균형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자 했다. 그에 뜻은 그러했다고 하나 르네상스를 포함한 모든 변화의 바람은 격동기에 태어나는 법이다. 피렌체를 예로 들면 격동기는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전반으로 세상이 차분해지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후반부터였고 15세기 중엽부터 반세기 동안은 확실히 정치적 성숙에 따른 사회 안정을 만끽한 시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결국 내분이 끊어지지 않던 피렌체가 겨우 국내 화합을 이룩한 1434년은 메디치가의 코시모가 참주정을 확립한 해이다. 이 참주정이 기능을 발휘한 60년 동안 즉 15세기 후반에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당시 활약한 피렌체 출신의 예술가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지겨울 만큼 많은 이들이 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언덕위에 올라서면 한눈에 내려다보일 만큼 좁은 피렌체 시내에서 한 세기에 한명 태어나기도 어려운 천재들이 서로 기량을 뽐내며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예술의 축제가 60년이나 이어지게 된 것이다. 피렌체 공화국은 금융업과 직물업에서는 이미 유럽에서 손꼽히는 세력을 얻고 있었지만 메디치 가문의 지배를 통해 정치가 성숙하면서 정치대국과 문화대국으로 발전해나가게 된다. 이렇게 되자 재능이 있다 자부하는 인재는 제 발로 피렌체를 찾아오게 되었고 예술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면서 이름에 걸맞은 도시로 태어나게 되었다.

 

4. 피렌체의 학문과 오락

 

 이와 같은 번영 속에서 피렌체인들의 생활은 당연 활기와 즐거움이 넘쳐나게 되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피렌체보다 더 공공 오락이 대단하거나 다양한 도시가 없었다. 피렌체는 다양한 상업길드 덕택으로 1년에 노동일수가 275일에 불과해서 놀 기회가 충분했다. 사 축제 중 메이데이가 가장 인기가 있는 날이었다. 이날이면 젊은이들은 일찍 일어나 연인의 집 대문을 꽃가지와 리본, 사탕 바른 견과류로 장식했고 여자들은 예쁜 옷을 입고 꽃과 이파리를 들고 산타 트리니타 광장에서 춤을 추었다. 또한 피렌체 시의 수호성인인 세례 요한 축제 때면 가게들이 모두 깃발 장식을 하고 사람을 태우지 않은 말들이 철퇴를 옆에 차고 행진을 했다.14 하지만 피렌체인 들이 단순하게 놀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당시 피렌체의 교육 수준은 상당히 높았었다. 피렌체는 무역의 중심지였던 만큼 육체노동 이상의 일을 하는 시민이라면 어느 정도 글을 읽고 셈이 가능한 편으로서 당시 유럽의 다른 어떤 도시들보다도 문맹이 적었다. 어린아이들은 초등학교와 흡사한 기관에서 간단한 읽기와 셈을 배우고 십대 중반에 들어서면 자신의 직업을 정해야만 했다. 상업에 뛰어들 수도 있고 공방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했으며 종교계나 관직에 진출하기를 희망하는 이들은 대학에 들어가는 방향을 택하게 되었다. 당시의 피렌체 대학은 메디치 가문의 후원 아래에서 요한 아르기로포울로스, 테오도루스 가차, 데메트리우스 칼콘딜라스 등의 학자를 교수로 채용했는데 이중에서 칼콘딜라스는 테메트리우스 크레텐시스와 함께 피렌체에서 최초로 호메로스의 인쇄본을 발행했다. 그 밖에 먼 유럽에서 온 학생들이 이 대학에 모여 그리스어를 공부했으며 나중에 헨리 8세의 주치의가 되는 토머스 리너커는 1487년부터 3년동안 피렌체에 머물면서 로렌조 데 메디치의 자녀들과 함께 칼콘딜라스의 강의를 들었다. 1488년에는 나중에 옥스퍼드에서 최초의 그리스어 교수가 되는 윌리엄 그로킨이 왔고 1489년에는 윌리엄 래티머가 와서 그로킨과 리너커를 도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15

 

5. 예술가로서의 피렌체인의 기질

 

 피렌체는 앞에서 밝혔던 것처럼 경제와 문화와 교육 이렇게 삼박자가 맞아떨어져 가면서 예술의 도시로서 성장해나갔다. 허나 예술의 메카가 되는데는 무엇보다도 피렌체인들의 기질을 들어보는 것이 마땅하다. 당시 피렌체인들은 자신이 상처를 입는 것도 불사할만큼 강렬한 비판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국내의 어떠한 분쟁이 벌어진다면 타 국가들보다 배나 될 정도로 다양하고 개인적인 주장들이 일어날 정도였다. 정국 안정을 생각하면 참으로 부적절한 기질이라 말할 수밖에 없지만 개인주의의 도가니라 해도 좋은 이 성향이 학문, 예술 분야에는 가장 적절한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도나텔로는 파도바에 초빙되어 제작한 걸작 기마상인 [가타멜라타 장군상]으로 북부 이탈리아 전역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러자 베네치아와 밀라노에서 서로 끌어가려 야단이 났지만 그는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가 버린다. 친구가 왜 그곳에 남아서 일을 계속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조각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곳에서는 피렌체 사람의 거리낌없는 험담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16그 시대의 공방은 역사적 도심이라고 불리는 피렌체 중심부에 모여 있었고 건물 일층의 안뜰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방에서 작업을 했다. 또한 공방이란 말은 작업장 이외에 가게라는 의미가 갖고 있었다. 가게이기도 하니 누구나 들어오는 것이 가능했었던 것이다. 개중에는 물건을 살 마음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살 생각도 없이 눈요기를 위해 방문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피렌체인들은 그냥 감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침없이 비판을 해대고는 했다. 예술가들이란 본래 자신감이 넘치지 않으면 될 수 없는 것이니 아마추어에 불과한 관중들의 비판에 반발 역시나 강하게 했을 테지만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들일수록 자부심과 탐욕이 강하기도 하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것이 찬사든 비판이든 그들은 그 의견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것을 받아들였을 것이고 방문객들이 모두 떠나가면 자신의 작품을 수정하는 것을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당시의 공방이 미를 추구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맡는 체제였던 것도 피렌체인들의 실용주의적 기질에 걸맞은 것이었다. 공방에서는 회화나 조각만 제작된 것이 아니라 축제에 사용되는 깃발이며 부인용 의상과 장신구, 탁상용 장식품, 대규모 건축물의 도면을 그리거나 디자인을 생각하거나 금. 은. 구리를 녹이는 등 온갖 종류의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일을 진행하는 방식도 전문 분야별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체제는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들과 비교해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베네치아인들의 명성은 화가로서 끝나지만 피렌체인들은 화가들 벗어나서 역시 조각가로 건축가로 시인이나 과학자로서 남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되는 인물들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브오날로티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강렬한 비판정신은 강렬한 호기심과 표리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미성숙한 예술가들이라지만 견습기간에 단순하게 그림만 그린다던가 조각만 한다던가로는 만족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회화는 화가의 개성을 전부 다 드러내지 못하고 단지 일부만을 표시할 수 있다. 그렇기에 피렌체 출신의 예술가들은 뭐든지 해야 하는 공방이라는 학교에서 일을 배운 뒤에 독립하여 자신의 공방을 차리고 자신이 재능 있다 믿어 의심치 않는 분야에서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 형태로서 성장해나갔다. 17물론 독립한 후에도 회화와 조각, 도시 계획, 인체 해부, 기계공작 등 광범위한 분야에 손을 댄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이탈리아 전역을 자신의 걸작인 회화나 조각 건축으로 메운듯한 느낌을 안기는 미켈란젤로처럼 전문 분야를 논하기 어려운 자들도 있다. 하지만 피렌체가 낳은 이 두 예술가는 다른 이들보다는 몇 단계는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자들로서 만능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천재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피렌체 예술가들의 기질은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건축가들은 건축만 전념하는 베네치아인들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베네치아의 경우는 피렌체파 예술가들이 성공을 거둔 뒤에야 거두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전문화가 이루어지면서 효율성을 중시하게 되었다. 하지만 초기의 예술의 형태는 전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마련이다. 새로운 발상은 반드시 기존의 테두리에서 벗어났을 때 태어나는 법이니 말이다. 비판 정신이 강한 피렌체 사람인만큼 기존의 테두리를 제거해버리는 것에 대한 저항감도 다른 지방의 이탈리아인보다 훨씬 약했을 것이다. 메디치 가문은 이러한 기질속에서 도약하기 시작한 것이다.

 

6.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

 

 이러한 피렌체인들이 쌓아놓은 모든 것들과 함께 메디치가문은 성장했다. 코시모와 피에로를 넘어가면서 피렌체는 완벽하게 메디치가의 지배 아래 놓아지게 되었고로렌조 데 메디치가 등장하면서 피렌체는 빛나게 되었다. 보통 한 개인의 역량에만 의지하는 국가의 생명은 짧은 법이다. 재능이 아무리 뛰어난다 한들 그 사람이 죽으면 만사가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임 지도자의 재능이 승계되는 예는 대단히 드물다. 허나 로렌조 데 메디치는 그 드문 경우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피렌체는 그의 지배 아래서 일찍이 없었던 광채가 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피렌체인들이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멋진 형태로 그들에게 안겼다. 이것이 최대의 효과를 가져오게 된 것은 로렌조 역시 같은 것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일 마니피코라는 이름 그대로 그 역시나 화려함을 누구보다 즐기고 있었고 피렌체인들은 로렌조 데 메디치 속에 자신들과 동질의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최고의 감각과 최대한의 화려함으로 제공해 주는 로렌조를 자랑으로 생각하고 사랑했던 것이다. 베로키오, 폴라이올로 공방 등은 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필리포리피, 보티첼리, 기를란다이오는 건필을 마음껏 휘둘렀다. 로렌조는 볼로냐와 파도바 두 유명 대학에 대항하여 피사 대학에 유능한 교수를 끌어모았다. 자신의 손으로 아예 대학 하나를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로렌조는 학예진흥을 중시하고 그것이 종국적으로 실리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피렌체 출신의 천재들을 피렌체에 묶어 두려는 시도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들을 로마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활발히 일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예로 들어 그가 1488년 동방에서 기린을 구해 프랑스 왕에게 선물로 바치고자 한 적이 있었는데 예술가들을 타국에 소개하는 행위는 기린을 보내는 것과 같은 목적이었던 것으로도 보여진다.18 이것을 보아 문명과 문화의 수출은 당시 대단히 중시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고 종국적으로 피렌체는 문명과 문화의 중심이라는 평판 때문에 정치와 군사적으로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었다.

 

7. 메디치와 피렌체의 유산

 

 문명과 문화의 중심이었다는 명성에 걸맞게 피렌체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메디치의 숨결이 곳곳에 남아있는 상태이다. 메디치 예배당을 살피면 파찌 가문의 음모로 요절한 줄리아노 데 메디치와 메디치의 위대한 수장이었던 로렌조 데 메디치의 무덤을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남아있고 미켈란젤로의 최고의 걸작이라 평해지는 다비드상의 모델은 미남으로 손꼽히던 요절한 줄리아노 데 메디치였다. 그 뿐이 아니다. 메디치 가문의 예술품 목록은 그들이 기거했던 피티궁을 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골동품들과 라파엘로나 다빈치의 걸작품들은 아직까지 모든 이들에게 귀중한 유산으로 남겨져 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확연한 증거품이 피렌체에 존재한다. 토스카나 지방의 이 아름다운 도시가 당대의 예술의 도시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피치 미술관일 것이다. 현재의 우피치 미술관은 본래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1세의 명령으로 건축되어진 것으로 나라 안의 주요한 13개 행정 관청을 통합하는 일종의 종합청사였다. 메디치 가문의 명성과 재력 그리고 권력은 계몽군주로서의 위엄을 갖추는데 주로 사용되어졌는데, 특히 작품수집에는 남다른 정성이 쏟아졌다. 이렇게 수집된 작품을 전시하고자 했기에 그 당시 단일 건물로는 가장 컸던 우피치는 미술관화 되어졌다. 그 안에 존재하는 예술품들의 가치는 짐작도 어려울 정도이다. 회화작품 그리기를 대단히 싫어했다 알려지는 미켈란젤로의 도니의 성가족, 보티첼리의 최고의 걸작이라 평가되는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그 외에도 수도 없이 많은 천재들의 작품이 집대성한 곳이며 메디치의 위상을 알려주는 증거인 것이다.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꼽히는 루브르나 대영박물관, 메트로폴리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작은 규모인 우피치지만 역사적 가치는 그 어떤 박물관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 우피치는 역사상으로선 첫 번째 박물관인 것이다. 우피치 이외의 다른 세계적인 박물관들은 대다수가 그 소장품들을 다른 나라에서 옮겨온 제국주의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테지만 우피치는 14-16세기에 피렌체에서 발달한 자국의 미술품이 바로 그 미술품이 제작되던 당시에 세워진 건물에 소장되어 있는 즉 소장품과 미술관이 동일한 역사의 현장과 상황 속에 함께 놓여 있는 미술관이자 피렌체란 도시의 예술성과 가치를 증명해주는 증거물인 것이다. 이 우피치 미술관 안에 존재하는 예술품들은 1737년 메디치 가문을 계승하고 있던 안나 마리아 루드비카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에 시집을 가게 되면서 오스트리아로 옮겨질 뻔 했지만 그녀가 메디치가문의 재산은 피렌체의 재산이라 말하며 모든 소장품을 토스카나 대공국에 기증하면서 피렌체의 영원한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19 이렇게 메디치 가문에서 모아온 장대한 컬렉션이 피렌체의 소유로 결정이 남으로서 결국 메디치 가문은 마지막 순간까지 피렌체를 예술의 메카로서 자리 잡게 해주는 역할을 다하게 되었던 것이다.

 

IV. 메디치가와 르네상스 예술

 

‘피렌체 등의 여러 도시에서는 지배자나 부유한 상인들이 다투어서 학자나 예술가를 후원함으로서 르네상스 문화를 더욱 촉진시켰다.’ 라는 이 구절은 중학교 사회교과서의 일부이다. 메디치 가문은 이 부유한 후원자들 중에서도 대표라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예술과 메디치 가문의 상관관계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예술후원의 전성기이자 메디치 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지배자들과 르네상스 예술의 관계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1.코시모 데 메디치와 르네상스 예술

 

 부친의 죽음과 함께 물려받은 은행업을 몇 배로 확장시킨 코시모 데 메디치는 시뇨리아가 되면서 정치와 경제 양면에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는 인문학자인 피치아노에게 자신의 별장을 주어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연구케 하였고 산 로렌조 성당의 개축비용을 지원하면서 르네상스 예술의 후원자의 모범이 무엇이라는 것을 확연히 드러내주었다. 그 결과 그는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되었는데 실제로 코시모 데 메디치만큼 무엇이나 모으게 하고 무엇이나 만들게 한 후원자도 없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도시의 기분을 잘 안다. 우리들 메디치가 쫓겨날 때까지 50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물건’은 남는다”20

 

이 말이 남은 것으로 보아 그는 민중의 기분이 매우 동요하기 쉬운 것이 특징이고 그들의 지지를 얻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나 그 지지를 유지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는 자신의 가문이 추방당한다 할지언정 남아있을 수 있도록 증거를 남기고자 했다. 그가 남긴 것은 건축물이나 회화, 조각이나 고사본 같은 물건뿐이 아니다.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 즉 플라톤 아카데미라고 부르는 고전 연구의 중심을 피렌체에 창립한 것도 코시모였다고 한다. 비잔틴제국의 명운이 끝나가는 것을 알아챈 그리스인 학자들은 피렌체의 메디치가에 의지하면 환영해 주리라는 생각으로 잇따라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 베네치아와 피렌체는 그들의 기대를 어기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피렌체가 더 화려했으며 고전 연구의 메카라는 인상이 짙게 되었다. 출판계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베네치아와는 달리 피렌체는 심포지엄 활동에 중점이 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메디치가의 별장은 이 심포지엄을 위한 회의장이 되어주었다. 참가자는 학식이 높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재능이 풍부한 인재는 의식주까지 보장받아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코시모 그 자신은 두드러지게 거론할 만큼 학구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키는데는 이상적인 후원자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가 1464년 세상을 떠나자 피렌체 시민은 그 직후 국부 즉 ‘조국의 아버지’라는 존칭을 그에게 바치기로 결의한다.

 

2. 로렌조 데 메디치와 르네상스 예술

 

 코시모와 아들 피에로의 사후 메디치 황금기를 만들어낸 장본인인 로렌조의 경우는 여러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들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우선 르네상스가 탄생시킨 최고의 천재 중 하나인 미켈란젤로와의 일화는 이러하다. 바자리에 따르면 로렌조는 소년들에게 특정한 기능을 익힐 기회와 좀더 넓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메디치 궁과 산 마르코 사이의 정원에 부지를 마련하고 오랜 친구이자 도나텔로의 제자인 베르톨도 디 지오반니를 선생으로 고용했으며 다양한 그림과 고대 흉상과 조각들을 학교의 화실과 야외에 세우도록 빌려주었다. 이곳에서 미켈란젤로는 늙은 목신의 두상을 본떠 작업하던 중 로렌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소년이던 미켈란젤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조각칼을 손에 쥐고 대리석 작업을 했음에도 목신상을 모방하는 솜씨가 너무나 빼어나 로렌조 역시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상상에 따라 목신의 입을 만들고 혀와 치아를 모두 조각하는 것을 보고 자만심을 없애고자 이렇게 말했다. ‘노인들의 치아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느냐’고 말이다 로렌조가 이 말을 끝으로 자리를 뜨자 미켈란젤로는 치아 중 하나를 부숴버리고 잇몸을 파내서 마치 이가 빠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는 로렌조가 다시 오자 그것을 보였다.21 로렌조는 이 소년의 재능과 열정에 감탄했고 젊은 재능을 키워주고자 결심했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부친에게 사람을 보내 그를 양자로 삼기를 청했고 이를 승낙받자 미켈란젤로에게 메디치 궁에 방 하나를 내주고 자신의 가문의 사람으로 여기고 돌봐주었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궁에 4년 동안 머물러있는 동안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키울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제공받으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대가로서 성장했던 것이다. 로렌조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도 인연을 맺었는데 그가 밀라노로 갔을 때 역시 그의 뒤를 봐주었다. 빈치 출생의 사생아였던 레오나르도는 열두 살 무렵 피렌체에 있는 베로키오의 작업실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 때 로렌조는 그의 조숙한 재능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결국 그는 레오나르도가 자신의 놀라운 재능의 나래를 활짝 펴기로 결심하던 차에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이 선친의 기마상을 조각할 예술가를 찾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작에게 레오나르도가 말의 머리를 본떠 만든 은제 수금을 보내면서 그를 추천했는데 이는 정치적인 목적 또한 가미된 일이었다. 로렌조 사후 2년 만에 피렌체에서 추방된 메디치 가문은 레오 10세의 등극으로 다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면서 르네상스 예술과의 인연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3. 레오 10세와 르네상스 예술

 

 로렌조 데 메디치와 비교하자면 레오 10세는 예술을 메디치가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자신의 정치력을 구축하는 데 이용하고자 하는 요소가 훨씬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우선 그는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후원해오던 산 로렌조 성당의 정면을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하게 되었고 바티칸 궁의 벽화에서는 자신의 정치선전을 꾀하고자 했다. 현재 보르고 화재의 방이라 불리는 이 방은 레오라는 이름을 지녔던 역대 교황의 업적을 그린 벽화가 그려져있다. 이 중에는 847년 도시의 중심이었던 보르고에 불이 났을 때 교황 레오 4세가 성호를 그으니 전소되었다는 기적을 그린 <보르고의 화재>,849년 아랍인들이 오스티아로 쳐들어 왔을 때 레오 4세가 성호를 그으니 갑자기 태풍이 몰아쳐 아랍인들을 전멸시켰다는 <오스티아 전투>, 800년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레오 3세에 의해 행해진 <샤를마뉴 대관식> 그리고 <레오 3세의 면죄>등이 있다. 그 중 <오스티아 전투>의 레오 4세와<샤를마뉴 대관식>의 레오 3세의 얼굴은 레오 10세 자신의 초상으로 그리게 했다.22 레오 10세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은 르네상스 예술가는 화가 라파엘로였다. 그는 레오 10세의 요청으로 앞에서 밝힌 보르고 화재의 방 벽화들과 레오 10세의 초상화들 그리고 그의 무덤제작까지 맡았고 라파엘로가 요절할 때까지 두 사람의 우정은 지속되었다.

 

V. 예술후원의 가치와 현실의 이익

 

 이렇게 가문의 대를 이어가면서 르네상스 예술을 가능하게 한 메디치 가문이 왜 예술을 후원하였을까? 라는 의문은 당연 자연스럽게 나오기 마련이다. 그들은 막대한 자본을 들여 성당을 짓고 벽화를 주문하며 그들의 궁에 신화와 역사이야기를 그리게 했다. 이런 그들의 실제 목적이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추측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예술품이 순수한 창작품이라고 믿던 낭만주의적인 사고의 세계를 뒤로 하고 그 당시 예술이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돌아가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후원은 다시금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자면 메디치 가문의 행동은 단순하게 사람이나 단체와 작품, 예술 등을 뒷받침하고 용기를 북돋고 장려하는 후원자의 행위라는 것만이 아닌 가문의 사회적인 지위를 상승시키고 정치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1.코시모 데 메디치 후원목적

 

 그렇기에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데 일등공신인 코시모 데 메디치에 대해서 일부의 학자들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그들은 후원으로 인하여 메디치 가문이 지속적인 권력을 갖기 위해서 행해졌을 수많은 권모술수는 가려지고 교회와 자선단체 그리고 인문학자들에게 아낌없이 후원하고 훌륭한 건축공사를 함으로서 돈을 깨끗하게 쓰는 것만을 보여주었다 여기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코시모는 자신의 부친 대부터 시작한 산 로렌조 성당의 개축에 거의 모든 경비를 부담하는 대신 주교좌 성당 안에 가족의 묘를 확보했다. 조반니와 코시모의 묘를 설치하고 코시모의 묘에도‘이 도시의 아버지’라 새겼으며 교회바닥에는 가문의 문장을 넣었다. 당시에 신흥가문이었던 메디치는 되도록 중심권에 세력의 지반을 굳히고 가문의 이미지를 부각시켜야 했던 것이다.

 

2.피에로와 로렌조 데 메디치의 후원목적

 

 그의 아들이었던 피에로 역시 자신의 후원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자선행위와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집과 가문을 고귀하게 하고, 성당과 예배소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비용으로 후원한다고 적고 있다. 자선 행위와 교회의 향상을 위한다는 목적은 의례적인 문구라 해도 가문을 고귀하게 만든다는 목적은 분명한 표현이었다. 피렌체의 큰 가문들은 이전의 후원자들이 한 것보다 더 큰 규모로 더 적극적으로 예술을 후원함으로서 이미 자리 잡고 있는 가문보다 자신의 가문이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라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로렌조 역시 그 후원의 뜻은 자신의 부친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로렌조의 경우는 그의 부친보다 훨씬 세련되고 수준 높은 후원을 행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둘 수 있을 것이다.

 

3. 레오 10세의 후원목적

 

 라파엘로의 <샤를마뉴의 대관식>

 

 로렌조의 차남이자 교황의 자리에 올라선 레오 10세 역시 예술의 후원을 행했으되 자신의 정치적인 이득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그 어떤 인물보다도 정치적 이득과 가문의 영광을 꾀한 인물이 레오 10세라 할 수 있다. 그가 의뢰한 산 로렌조 성당의 정면이 만들어진 형태를 보아도 이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곳에 만들어진 메디치 가문의 두 인물들은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표현되어졌다. 아마 후원자인 레오 10세의 요구라 여겨지는데 그는 이것을 통해 메디치가를 도덕적으로 이상화시키는 한편 바티칸 궁의 벽화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으면서 정치적인 선전을 꾀했던 것이다.23 <샤를마뉴의 대관식>이라는 그림을 보아도 레오 10세의 의도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그림이 제작되기 시작한 1516년의 한해 전이 1515년 교황 레오 10세와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는 볼로냐 회담을 가졌다. 이 비밀협정에서 교황은 프랑수와 1세가 터키군을 막아준다면 비잔틴의 왕관을 씌워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미 700년전인 800년 프랑스왕인 샤를마뉴 또한 전 유럽을 정복하고 일부 영토를 교황에서 헌납함으로서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고 정통성을 인정받은 일이 있었다. 레오 3세의 얼굴을 레오 10세의 얼굴로 대체하면서 그리고 샤를마뉴의 얼굴을 프랑수와 1세의 얼굴로 그림으로서 레오 10세와 프랑수와 1세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과거의 인물들의 대업을 이어받았다는 착각을 하도록 만들어진 그림인 것이다. 유치해보이기도 한 주문자가 자신의 얼굴을 성경의 인물이나 역사사건의 인물에 대치시키는 이러한 방식이 어리석고 단순해 보일지는 모르나 정치적으로는 대단히 효과적인 주문이었다을런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렇듯 메디치 가문의 예술후원은 단순하게 학문과 예술의 애호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메디치 가문은 종교심과 이익의 사회 환원이라던가 감상의 즐거움 등 여러 가지의 이유로 예술의 후원자가 되었지만 그들의 가장 큰 목적은 무엇보다도 가문의 지위향상과 정치선전이라 할 수 있다. 코시모는 도시 한 가운데에 산 로렌조 성당을 개축하면서 타 가문들에게 신흥가문이던 메디치의 위세를 과시하고자 했고 로렌조는 옛 미술품들을 수집하고 작가와 화가들을 다른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선전하면서 외교적 기반을 굳혔다. 레오 10세는 역사적인 사건의 주인공인 레오 3세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대치시키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레오 3세와 동일하게 느끼도록 꾀하고자 했었다. 이렇게 150년 동안 행해진 후원은 어떤 면에서 메디치 가문이 예술의 후원자라는 느낌보다는 고객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상호간의 이득을 꾀하는 목적이 뒷면에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VI. 맺음말

 

 부와 패션과 권력이 총망라된 300년간의 메디치가문의 드라마는 르네상스라는 단어와 공존해왔다. 앞에 글에서 메디치 가문이 과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렇게 르네상스의 문화예술을 후원하고자 했는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으며 메디치 가문의 최고의 지도자였던 로렌조 데 메디치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했다. 세 번째로 피렌체에는 어떠한 특별함이 존재했기에 르네상스 예술의 중심지로서 명성을 높이게 되었는가에 대해 고찰하고자 했고 메디치가문의 세 명의 인물과 르네상스 예술의 발전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고자 했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세 명의 인물이 과연 어떤 이유로 르네상스 문화예술을 후원했는지에 대한 예술후원의 가치와 현실적 이익에 대하여 깊이 탐구해보고자 하는 것이 필자의 의도였다. 이렇게 여러 방향을 탐구해본 결과 필자의 결론은 이러하다. 당대의 예술의 후원자가 메디치 가문만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탈리아에는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이라던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예술의 이름 높은 후원자였던 이사벨라 곤자가의 친정가문인 페라라의 데스테가문 그밖에 나폴리나 베네치아의 수도 없이 많은 명가들이 당대의 르네상스의 선두주자로 나서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이들을 제치고 선두에 나선 것은 메디치 가문이었다. 허나 이들의 중심에 서 있었던 메디치 가문의 후원자로서의 입장은 앞에서 확실하게 밝히고자 했던 것처럼 결코 순수한 의미가 아닌 정치와 권력의 연결을 피할 수 없는 상호간의 거래와도 같은 후원이었다. 하지만 필자의 의견으로는 인간이 하는 일에 있어서 그 동기로서가 아니라 결과로 평가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더군다나 인간은 기본적으로 완벽하게 선인일 수도 악인일수도 없는 생물이다. 메디치 가문이 아무리 상업적인 목적에 의해서 후원을 했다 할지언정 그들 역시 인간인 이상 자신들의 후원에 의해 탄생된 위대한 문명을 보고 기쁨을 느낄지 않았을 리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후원을 받은 예술가들과의 친분역시 단순한 거래에서 시작했을지라도 그들 사이에 진정한 신뢰가 탄생했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본다. 인간이란 은혜를 입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은혜를 베푸는 입장에서도 의리를 느끼는 법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메디치 가문의 후원의 의도 자체가 어떤 것이었다 할지언정 그들은 르네상스라는 시대를 만들어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일등공신이었고 피렌체는 그들의 손에 의해 당대 예술의 중심지이자 문화의 본고장으로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으며 결코 잊혀지지 않을 대가들을 탄생시켰다. 그러한 점을 보았을 때 비록 메디치 가문의 대가 끊겼을지언정 그들의 남겨놓은 유산은 영원히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기고 메디치라는 이름 역시나 르네상스와 함께 공존하면서 그 가치를 빛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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