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터넷의 글들을 개인 용무에 의해 수집하였습니다.
문제가 된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출처] [문현진] 인도지도자 마하트마 간디: My life is my message|작성자 DR 문현진
[출처] 두산백과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영국의 식민지배 시절에 비폭력 저항운동을 통해 결국 조국 인도의 독립을 이끌어낸 지도자로서 지금도 전 세계인들의 추앙을 받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에게 영감을 준 사건이 있었다. 1919년 3월 1일 한반도에서 일어난 3·1운동이다.
지난 7월 9일 인도를 국빈방문 중이던 문재인 대통령도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함께 뉴델리의 간디기념관을 찾아가 헌화하고 두 나라가 겪었던 공통의 역사적 아픔을 언급하며 앞으로도 평화를 위한 정신적 가치를 함께 지켜나가자고 강조했다.
한국과 인도는 독립기념일 마저 같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이룬 지 2년 뒤인 1947년 8월 15일에 인도 역시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식민지배에 대한 비폭력 저항운동의 역사를 공유할 뿐 아니라 독립기념일도 같다는 점은 두 나라의 관계가 마치 운명적으로 연결돼있음을 시사한다.
맥켄디 라이 박사는 "3·1(삼일. March 1st)을 인도식 발음으로 하면 '함께 모이자'란 뜻이 된다."며....
간디의 생애는 "My life is my Message"(나의 삶이 나의 메시지이다) - 마하트마 간디가 총탄을 입고 쓰러졌을 때 입고 있던 옷에 쓰여진 글귀이다. 간디의 생애는 그가 남긴 이 글귀처럼 그 자체가 인류에게 전하는 교훈이다.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난 간디는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소년이었다. 그는 고등 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으로 건너가 법률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다.
간디는 46세에 고국으로 돌아와 인도 독립을 위해 본격적으로 투쟁에 들어갔다. 감옥을 드나들면서 간디가 벌인 투쟁은 무저항 운동이었다. 그리고 단식 투쟁을 하면서 영국에 저항하고 인도 국민을 하나로 묶었다.
1919년, 영국은 인도를 억압하기 위해 영국에 항거하는 사람은 재판 없이 처형할 수 있다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자 간디는 새로운 방법으로 대항했다. 비폭력 저항 운동을 벌여 영국인이 가르치는 학교에도 다니지 말고 영국 물건도 쓰지 말자고 했던 것이다.
간디는 또한 비협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영국의 요구를 무시하고 영국 재판소에 가지 않도록 인도 사람끼리 타협하고 양보하기로 하며, 마치 영국 사람들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자고 했다.
아무리 영국이 인도 사람들을 억지로 잡아가도 인도 사람들은 반항하지 않았다. 이렇듯 인도 사람들이 철저하게 비폭력주의에 따르자 영국 정부는 감옥에 갇힌 인도 사람들을 풀어 주고 세금을 크게 올리려 했던 것도 포기했다. 그리고 영국에 대항하는 인도 사람들을 바로 감옥에 넣을 수 있는 ‘롤라트 법’도 폐지했다.
하지만 1930년에 ‘소금법’을 만들어 모든 소금을 영국에서 수입해 쓰라고 했다. 그러자 간디는 직접 소금을 만들기로 했다. 소금이 나는 해안으로 소금 행진을 떠났고 많은 제자들이 간디의 뒤를 이었다.
이 일로 간디는 체포되었다. 간디가 감옥에 들어간 것을 안 인도 사람들은 영국인 소금 공장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하였고 그 일은 곧 세계로 알려졌다. 감옥에서도 간디는 불복종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책도 쓰고 신문 기사도 썼으며 단식도 했다.
영국은 간디가 감옥에서 죽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간디를 석방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7년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으로 인도 연방과 파키스탄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간디는 이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힌두교 신자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간디는 오늘날 위대한 넋이라는 뜻의 ‘마하트마’라고 불리고 있다.
간디박물관에는 간디의 유품들이 전시돼 있고 그의 생애가 기록된 자료들이 다수 보관돼있다. '미래는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 '비폭력은 인류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등 간디가 남긴 명언을 찾아볼 수 있다.
Your beliefs become your thoughts.
Your thoughts become your words.
Your words become your actions.
Your actions become your habits.
Your habits become your values.
Your values become your destiny.
그대의 믿음은 그대의 생각이 된다.
그대의 생각은 그대의 말이 된다.
그대의 말은 그대의 행동이 된다.
그대의 행동은 그대의 습관이 된다.
그대의 습관은 그대의 가치가 된다.
그대의 가치는 그대의 운명이 된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그는 조국이 수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때 유창한 연설을 하거나 아름다운 설교를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조국의 고통 속에 스스로 뛰어 들어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영국은 인도에서 면화를 헐값에 가져가서 면제품을 만든 후 비싼 가격으로 인도인들에게 판매하며 폭리를 취했다. 인도인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하며, 반면 영국인들은 부를 취하는 형국이었다. 이에 간디는 매일 손수 물레를 돌리며 스스로 옷을 지어 이것은 영국에 비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이었고, 인도 국민들에게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자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인도 국기 중간에 물레 형상이 있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란다.
인도에 소금이 생산됨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인도인들은 반드시 영국산 소금만을 사서 먹도록 식민지 정책을 펼치며, 심지어 영국산 소금에 비싼 소금세를 부과하며 인도인들을 착취하였다. 이에 대해 간디는 61세의 나이로 40도가 넘는 가운데 내륙에서 단디해변까지 한달간 소금행진을 하며 비폭력으로 영국에 저항하였으며 78명으로 시작된 행진은 마지막에 수만명으로 불어났다. 그는 단디해변에 도착해서 손수 소금을 만들고 그 소금을 집어 올려 맛을 보는 그의 모습은 인도인들에게 큰 메시지가 되었다.
‘소금행진’은 간디의 정신을 잘 보여준 사건이다.
영국은 인도인의 소금 생산 판매를 금지, 소금 산업을 독점하고 인도인에게 과도한 세금을 매겼다. 이에 간디는 1930년 3월 12일부터 4월 6일까지 24일간 사바르마티 아쉬람에서 구자라트 단디까지 390km를 행진했다. 결국 영국은 이듬해 소금법을 폐지하고 말았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조국은 힌두교와 이슬람교로 나뉘어졌고,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갈라졌다. 간디는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하나되기 위해 또다른 도전이 시작되었고 조국의 처참한 상황을 스스로 금식을 하며 표현하였다. 두 진영을 오고가며 화합을 위한 활동을 펼쳐나가는 가운데 1948년 1월 30일, 그의 나이 79세, 힌두교와 이슬람 간의 융합에 반대한 과격 힌두교인이 쏜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삶을 통해 남긴 간디의 메시지는 위대한 영혼이 되어 100년의 역사와 국경과 종교를 뛰어 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이 되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 1000년간 최고의 혁명’으로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운동’을 선정.
2003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란 시민운동가 시린 에바디가 이듬해 프랑스 파리으 한 힌구교 교사로부터 “ 간디의 정신을 기릴 기념일 제정을 위해 힘써 달라”는 제안을 받아,
2007년 1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사티아그라하 콘퍼런스에서 이 안건이 결의,
그해 6월 국제 연합은 총회 투표를 거쳤고, 결국 UN(국제연합)은 간디의 생일에서 따와 매년 10월 2일 ‘세계 비폭력의 날’로 제정하기로 결정.
간디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단어들로 요약.
아힘사(비폭력)
사티아그라하(진리를 향한 헌신)
브라흐마차리아(감각의 통제)
아파리그라하(무소유)
출생 1869.10.2 ~ 사망 1948.1.30
출생과 집안
1869년 10월 2일 인도 서부 포르반다르(또는 수다마푸리 Sudamapuri)에서 태어났다. 간디의 집안은 상인계급(Bania Caste)에 속했고 식료품상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우탐찬드 간디(Uttamchand Gandhi)는 포르반다르에서 관리로 근무했다. 그는 아들 6명을 두었는데 그중 5번째 아들 카바 간디(Kaba Gandhi)가 마하트마 간디의 아버지이다. 카바 간디는 부인이 매번 사망하여 네번이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 아내였던 푸틀리바이(Putlibai) 사이에서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가 마하트마 간디였다. 카바 간디가 라지코트의 관리로 봉직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이주하여 초급학교를 다녔다. 조혼 풍습에 따라 13세에 동갑인 카스투르바이(Kasturbai)와 결혼했다. 당시 결혼은 형, 삼촌과 동시에 치뤄진 합동결혼식 이었다. 16세에 아이를 낳았으나 4일만에 죽었고 그해 아버지도 치루염으로 사망하였다. 훗날 마하트마 간디는 그의 자서전에서 어린시절 결혼생활에 죄책감을 느꼈고 인도의 조혼풍습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영국 유학
1887년 18세 때 아메다바드(Ahmedabad)에서 치뤄진 대학 자격시험에 합격하였다. 학비가 싼 사말다스(Samaldas)대학에 입학하였지만 수업 내용이 어려워 첫 학기만 다니고 그만두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돌아오면 좋은 일자리와 수익이 보장된다는 권유에 영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집안에서는 종교에 반대되는 생활을 하게 될것이라고 반대를 하지만 간디는 종교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를 하고 9월 4일 뭄바이를 떠나 런던으로 향했다. 영국에 도착하여 채식과 관습의 차이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런던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1891년 6월 10일 간디는 변호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11일에 고등법원에 등록하였고 12일 인도 귀국길에 올랐다. 간디는 당시 런던 시험에 통과하여 변호사의 자격을 취득하는 과정이 쉬웠고 그 시험조차 가치가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고 자서전에 기록했다. 면허는 취득했지만 그것으로 어떻게 법정에 서고 직업으로서 밥을 먹고 살 수 있을지 의심과 걱정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다고 술회했다.
변호사 개업과 남아프리카 여행
귀국하여 뭄바이와 라지코트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지만 변호사로서 자질이 부족하여 실패하였다. 1893년 소송사건을 의뢰받아 1년간의 계약으로 남(南)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으로 건너갔다. 이 남아프리카 여행은 간디의 생애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7만 명의 인도 사람이 이주해 있었는데 백인에게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에 그는 거기에 사는 인도사람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결심하고 남아프리카 연방 당국에 대한 인종차별 반대투쟁단체를 조직, 1914년까지 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인종차별에 저항
그동안 진리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을 하였으며, 이러한 기반 위에 아힘사(ahi涵 sā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를 중심으로 하는 간디주의를 형성하였다. 간디 자신이 전개한 인종차별, 압박에 대한 투쟁(사티아그라하:satyagraha) 및 자기실현을 위한 인격의 도야와 수양(修養)의 노력은 어느 것이나 훗날 간디가 인도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의 모형이 되었고, 또한 아슈라마(āś rama:修道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인도인의 정신개조계획의 토대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최초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1906년 아시아인 등록법을 제정한 트란스발주(州)에서 일어났다.
차별법에 대한 투쟁
이 투쟁은 그로부터 약 8년 동안 인두세(人頭稅)를 비롯한 여러 차별법에 반대하기 위하여 계속되었으며, 남아프리카의 여러 주로 퍼져나갔다. 특히 1913년에 44세가 된 간디가 선두에 서서 행진한 나탈주(州)에서 트란스발주까지의 ‘사티아그라하 행진’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간디를 비롯한 행진 참가자 4,000명은 남아프리카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악법을 반대하는 주장은 세계적 여론의 동정을 모아 당국을 굴복시켰다. 결국 아시아인 구제법이 제정되어 인도인에 대한 차별법은 모두 폐지되기에 이르렀으며, 이 투쟁으로 간디는 남아프리카의 간디에서 일약 세계의 간디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사명을 다한 간디는 1915년에 귀국하였는데, 정치운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토지분쟁의 해결 등에 노력하였다.
인도에서 비폭력 저항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전쟁 후 영국의 배신과 1919년의 롤라트 법안(Rowlatt Act)과 같은 반란진압조령(條令)의 시행 때문에, 사티아그라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인도 여러 곳을 두루 순회하였고 수방(手紡:charkha)운동을 장려하였다. 1919년 인도국민회의파의 연차대회에서는 간디의 지도 하에 영국에 대한 비협력운동 방침이 채택, 납세거부·취업거부·상품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 저항을 실시하였다. 이듬해에 반영·비협력 운동이 선언되고 외국제 직물의 불매운동은 성공하였으나, 인도 각지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로 운동은 잠시 중지되었다.
투옥과 석방
그 동안 간디는 투옥되었다가 풀려 나왔으며, 1924년부터 1년간 인도국민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수방운동으로써 인도인이 자력에 의한 농촌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1929년의 연차대회에서 국민회의파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완전독립을 선언하였고, 61세가 된 간디는 1930년 3월에 사티아그라하운동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소금세 신설 반대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구금되었으며, 1931년 석방 후, 어윈 총독과 절충한 결과, 간디어윈 협정을 체결하여 반영(反英) 불복종운동을 중지하였다. 간디어윈협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탄압정책을 쓰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운동을 재개하여 투옥되었다가 1932년 석방되었다.
인도 독립투쟁과 종교분쟁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의 찬성을 얻지도 않고 인도를 전쟁에 투입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한 인도는 완전독립의 약속을 얻어 내려고 노력하였으나, 상반된 이해관계로 타결을 보지 못하고, 1942년의 봄베이대회에서 국민회의파는 영국세력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여 공전의 대규모 반영불복종운동에 돌입하였다. 이로 인해 간디는 73세의 노령으로 다시 체포되어 1년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전쟁 후에는 인도를 하나의 감옥으로 보고 전화(戰禍)와 굶주림으로 거칠어진 인심에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기 위하여 인도의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힌두 ·이슬람의 화해에 따른 인도통일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주권을 넘겨줌에 있어서 인도의 대정당인 국민회의파와 전인도(全印度) 이슬람 연맹이 인도를 둘로 분할 독립할 것을 협정한 결과 오히려 격렬한 힌두 ·이슬람의 대립소동이 벌어졌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융화 활동 전개와 사망
1947년 7월 인도가 이러한 분란 속에서 분할 독립했을 때, 간디의 나이는 78세였으나 고령에도 불구하고 소동이 가장 격화되어 있던 벵갈에서 힌두·이슬람의 융화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듬해인 1948년 1월, 이 활동의 행선지를 뉴델리로 연장, 뉴델리의 소요를 진압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1월 30일 반(反)이슬람 극우파인 한 청년의 흉탄에 쓰러졌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R.타고르의 방문을 받아 ‘마하트마(Mahatma: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고, 그 후로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그의 위대한 영혼은 인도민족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평가
일반적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폭력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으나, 인도에 있어서는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사상에 입각하여 평화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간디의 주저 《인도의 자치(自治)》에서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반서구사상(反西歐思想)은 그의 단편적인 편모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평화사상과 평화에 바친 업적은 실천면에서 볼 때 민주적 민족주의자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며, 특히 비폭력·무저항주의는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으로 평가 받는다.
마하트마 간디 연보
출생 1869.10.2~ 사망 1948.1.30
1869 10월 2일 인도 포르반다르에서 출생.
1888 법률 공부를 위해 영국으로 유학.
1891 변호사 면허 취득 후 인도로 돌아옴.
1893 남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에서 인종차별 반대투쟁단체를 조직, 지도자로 활동.
1906 트란스발주에서 '아시아인 등록법'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임.
1915 인도로 돌아와 아마다바트에 협동 농장 '아시람'을 차림.
1919 국민회의파의 연차대회에서 영국에 대한 비협력운동 방침을 채택.
1930 '소금세' 신설에 반대하는 행진을 지휘하다가 구금 됨.
1942 봄베이대회에서 국민회의파가 영국세력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여 공전의 대규모 반영불복종운동에 돌입.
1946 인도 분할 독립.
1948 반 이슬람 극우파인 한 청년의 융탄에 맞아 사망.
'*책 > ㅡㅡ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리자청.홍콩청쿵그룹(리카싱) (0) | 2014.01.30 |
|---|